'2011년'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1/12/26 오늘의 테마 - 2011년 결산
- 오늘의 테마 - 2011년 결산
- eXprEsSioN
- 2011/12/26 22:25
- 2011년, 오늘의 테마
일년 전 이맘때 난 독일에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ㄱㅈ언니집에서 놀았다.
낮에 탕수육이며 깐풍기며 잔뜩 튀겨서 언니 집에 갔고, 거기서 보지 못했던 한국예능프로를 다운받아 봤었다.
즐겁게 수다도 떨었다. 술도 먹었고. (술을 잘 먹지 않는 언니는 나를 위해 일부러 술을 사놓으셨었던 걸로 기억한다. 흐흐)
그리고 난 언니 집에서 뻗어잤다. 으흐흐.
크리스마스날 아침 눈을 떠보니 언니는 침대에 앉아 괴테의 "시와 진실"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그 모습이 선명하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나도 책을 즐겨읽긴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괴테의 "시와 진실"이라니.
하루키도 아니고, 쥐스킨트도 아니고, 괴테라니.
아직까지도 내가 '공부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때면 언니의 그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난 언니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니, 주제에 맞게 아침은 가요를 들으며 시작해도 되겠지.
이제 2011년도 며칠 안남았다,
내년이면 스물아홉. 서른까진 일년하고 6일 남았구나.
스물여덟의 끝자락을 붙들고 올 한해를 정리할까 싶어 끄적인다.
1월, 2월. 독일에서 한국에 왔다.
1월까진 독일에 있었고, 막판에 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 전에 미리 사두었던 카프카-Handbuch를 포함해서 내 논문의 시초가 된 Christine Kanz의 "선고" 분석까지.
칸츠의 글을 읽으면서 침대에 누워 인상적이고 필요한 구절들은 밑줄쳐가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틈틈이 워드로 생각들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친구들을 만나 선물들을 주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ㅅㅈ언니와 린을 만났던 2월 21일.
홍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합정의 자그마한 바에 들어가 포도주를 세병 비웠었다.
셋 다 취해서 급기야 한시간 넘게 영어로 떠들기 시작했고,
만취한 린은 그 자리에 토했다. 끙.
이미 주량을 넘긴지 한참 지났던 ㅅㅈ은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바짝 잡고 린을 데리고 화장실에 갔고,
난 주인언니한테 미안해서 토사물을 손수 다 닦아 치웠다.
각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데, 우리 셋 다 다음날 스케쥴이 있었다. ㅡㅡ^
다음날 서로 문자를 보내며 힘들다죽겠다죽겠다 소리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난 그날 대학원 모임이 있었고, 그 전에 ㅇㅈ을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토하고 약국에 가서 숙취약을 사먹을 정도로 속이 안좋았다.
그때 알았다.
와인은, 정말 더.러.운. 술이구나-라고.
그리고는 그 이후로는 와인을 예전만큼 쉽게(?) 보지 않는다.
어쨌든 대학원 모임을 갔고, 처음으로 대규모 자리에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저녁은 시골집에서 먹었는데, 건너편에 앉은 신입생은 열심히 고기를 굽고,
낯을 가리는 나는 옆에 앉은 ㅈㅌ오빠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수다를 다 떨고 나니 고기판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고,
2차를 간다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난 사당으로 이사 간 깽을 방문했다.
집이 꽤 커서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 가기 전까지 죄다 녹두에 뭉쳐살던 우리가 어느덧 각자 다른 동네로 이사갔다는 사실이,
그리고 다들 이제 엄연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고딩친구인 ㅅㅎ마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개강 전 할일도 없었던 나는 태릉 쪽에 있는 병원에 찾아가 ㅅㅎ 딸 ㅇㅅ를 보고 왔다.
우리 겸둥이 ㅅㅎ가 아이엄마가 되었다니.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나이를 먹는구나, 이렇게 세월이 가고 우리는 살아가는구나.
3월이 되어 개강을 했고, 수업을 잘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사람을 발견했다.
술만 먹으면 생각이 나고 시야에 들어오면 미소를 띠게 되는 그런 사람.
만우절에는 세발과 함께 ㅅㅎ를 찾아갔다.
아이는 인형같이 작고 예뻤다.
사진을 찍어대며 애가 한번 꼼지락거리면 호들갑을 떨며 예뻐했다.
셋이 모여 수다를 떠니, 옛생각이 나면서, 순간, 드라마에서 보던대로 친구들 중 한명이 결혼해서 애를 낳고, 나머지 친구들이 그 집에 놀러가 수다를 떠는 20대 후반의 미혼여성들의 모습이 이런거로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왠지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공허했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서 ㅈㅅ언니에게 연락을 하여 맥주를 먹기 시작했다.
그 때 언니랑 속깊은 얘기까지 다 했던 것 같다.
술도 맘껏 마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때 꽂혔던 곡이 바로 코린 베일리 레이의 "Just like a star"였다.
컬러링도, 벨소리도 죄다 이걸로 설정해놨었다.
그래서였을까, 28살 4월달에 처음으로 혼자서 (술에 취해) 노래방에 갔었다.
새벽에 들어가 한참 노래를 부르고 나오니 해가 떠있었다. 첫차를 타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4월달은 즐거웠었다.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어갔고, 좋아하는 마음이 시작되면 으레 그렇듯이 온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들었었다.
4월이라는 잔인한 달이 조금씩 새싹을 내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파릇파릇 무언가를 피우려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5월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웠다.
생일을 핑계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신나게 놀았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야구장이라는 곳도 가보고,
그 사람과 단둘이 밥도 처음 먹어보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도 잔뜩 찍으면서
찬란한 봄날들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내 안에 숨어있던 징글한 놈이 계속 고개를 내밀려 바둥거리고 있었다.
어느 하루는 아무 이유없이 세시간동안을 울었고,
저녁에는 센치해져서 술을 찾기도 했고
과거의 악몽이 밤에 찾아와 날 잠에서 깨우기도 했다.
웃음 뒤에는 괴물이 발톱을 세우고 내가 혼자 있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혼자가 되면 사정없이 할퀴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6월달은 '나름' 격동의 시기였다.
처음으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했고 상세불명의 양극성 정동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쉽게 말하면 '조울증'. 그게 세상이 내 안의 괴물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생활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약을 먹기 시작했고,
필라테스를 등록했으며 부산으로 여행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물론, 논문 준비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페미니즘과 근대적 주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단, 논문에 어떻게 엮어 나갈지는 전혀 생각치도 않은채.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마음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지만.
학기는 끝나가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기억나는 건...깽과 ㅅㅇ의 선물을 하기 위해 열중했던 퀼트.
둘은 생일이 일주일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다른 색상의 파우치를 만들기로 했었다.
학교에서 과사근무를 하면서 꾸준히 바느질을 했다.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
다행이도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아직도 잘 들고 다닌다.
(평생 A/S를 약속했으니 고장나지 않길 바랄뿐이다.)
계획했던대로 부산도 갔다.
마리와 깽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물론 금요일밤에 출발을 했기에 놀 수 있는 날은 이틀밖에 없었지만.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원래는 김해 사는 깽양집에서 이틀 자기로 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극적인 상황때문에 마리네 외삼촌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다행이도 그 분은 부산 중구에 사셨기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거기엔 마리 어머니, 마리 동생, 마리 일본이모, 마리 외삼촌, 마리 사촌동생까지 다 있었다.
아침부터 배터지게 아침밥을 얻어먹고 쿨하신 가족분들 덕에 마리 일본이모분과 함께 맞담배를 피며 하루를 시작했다.
일단 범어사로 출발했다.
집에서 나설때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가 오지 않아 "난 정말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범어사에 도착하니 웬 비가.....비가....'폭우'라는 단어가 우스울만큼 퍼부었다.
범어사는 아름다웠다.
난 천주교신자인데도 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절만이 갖는 고요함 때문이다.
자연 속에 어우러진 건물들과 그 공간이 주는 평안함이 너무 좋다.
비가 와도 마리와 나는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구경했다.
좋았다. 정말 좋았다. 옷이 다 젖어도 즐거웠다.
내려와서는 마리 가족분들과 깽과 합류하여 남포동 시장골목에서 먹을 것들을 섭렵했다.
참 맛있었는데...쩝.
비가 퍼붓는데 바다를 봐야한다고 우겼던 나는 결국 마리와 깽을 이끌고 광안리에 가서 바다에 발도 담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때문에 둘이 참 고생했다.
그 전까진 KTX 한번 타본적 없는 서울촌년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보고 싶은 건 죄다 같이 보고, 같이 가고...
(고맙다 친구들!)
파이널로는 돼지국밥!
아, 그 맛은 정말 잊을 수 없이 좋았다.
서울에서는 먹어볼 수 없다는 게 눈물 한방울 정도 나올 만큼 아쉽다. 그정도로 맛있었다.
그날 저녁 깽 집에 들어가는 길,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 아저씨는 나의 서울말을 듣고 나긋나긋하다고 칭찬하셨고,
그런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너무나 기뻐 날뛸뻔했다. (세상에, 내가 나긋나긋하다니!)
다음날에는 다시 남포동에 갔고, 마지막 쇼핑을 했다.
몰랐는데, 남포동 윗골목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물건들이 들어오는 가게들이 즐비해있다.
거기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나무젓가락을 마구 샀다.
(그 전날에 마리 가족분들이 점심값을 다 내주셨기 때문에 예산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책방골목도 구경했고, 예상외의 득템("한국 독어독문학 연구 문헌 서지": 87년까지 나온 독어독문학계 논문들 서지정보가 다 나온 책. ㅎㄷㄷ)을 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부산 여행도 그렇게, 즐겁게 지나갔다.
그러나 올 방학에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웃겼던 건, 졸업한지 2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학부 연극제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것.
그래봤자 '각색'이라는 자그마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논문에 적잖은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과방에서 이틀을 밤을 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것도 독어 원문이랑 번역본이랑 판본이 달라서 한번 끝냈던 각색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다 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ㅇㅎ이와 타이핑 및 각색 방향을 잡느라 밤을 샜고, 그 다음에는 독일에서 온 크리스티나와 연출과 넷이서 다 같이 밤을 샜다. 그 날은 타이핑까지 다 끝내고 제본을 맡기기 위해 밤을 새고 나서도 난 오후까지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아침에 ㅇㅎ이가 먼저 가고, 다음에는 연출이 연극 연습에 참여하기 위해 가고, 나중에는 크리스티나까지 가버렸었다. 나만 외로이 남아 몇 백번을 봤을 대본을 보고, 또 보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밥도 못먹고 오후 세시까지 작업을 해서 제본집에 맡기고 난 일산으로 튀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난 연극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진행상황은 약간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쳐가기도 했거니와, 아도르노 스터디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건 손을 댈 시간도 없었다. 빨리 끝내겠다는 일념하에 진행된 스터디는 일주일 내내 붙잡고 있어야 소화할 수 있는 분량으로 책정되었고, 간간히 제주도에 내려가야하는 ㅈㅌ오빠의 스케쥴에 맞춰 아침부터 오후까지 마라톤스터디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처럼 이년을 공부하면 박사학위따위 우습게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는 언제나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법.
X양의 제보, 날짜도 기억난다. 7월 13일 수요일 저녁.
이미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은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에 난 울었고, 집에 고이 모셔둔 꼬냑을 8잔 들이켰다.
잠이 오지 않았고, 다시 우울증에 빠지는 듯 했다.
깽, ㅅㅇ, 마리에게 전화를 걸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내 인생 왜 이따위냐고.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냐고.
오죽했으면 마리는 몇시간이고 나랑 통화를 했으며 깽과 ㅅㅇ은 다다음날 날 만나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술을 먹으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날 사랑한다던 남자친구가 버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슬플 뿐이었고, 재수없는 내 팔자가 한심스러웠을 뿐이다.
그 사람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나를 이상하다 했다.
기분이 나빠도 된다고. 기분은 이유가 없어도 나쁠 수 있다고.
기분은 감정인데, 그게 왜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야 나빠질 수 있냐고.
나 스스로를 너무 분석하지 말라고.
그러나 난 정말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 옆에는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는데.
나의 전화 한통에 이렇게 모여주는 친구들이 든든하게 나를 지키고 있는데
기분 나쁠 틈이 어디있었겠는가.
그리고 7월 마지막 주에는 우면산이 무너질 정도의 폭우가 왔다.
그러나 난 비를 뚫고 학교를 가야했다.
왜? 스터디 발제도 있었고, 연극대본문제도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렸던 연극각색 때문에 난 정말 우울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독일대학과 우리학교 교류프로그램 조교일까지 떠맡게 되어 분노게이지가 급상승하기도 했었다.
그 와중에 지도교수님께서는 이전에는 기피하시던 논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마음은 마구 찢겨진 상태에서 나는 최저치를 찍고 있었다.
그 상태는 8월까지 이어졌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나마 날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독일에서 온 구원투수, 크리스티나 덕분이었다.
일주일에 거의 세번씩 그 아이와 술을 먹었고, 낮에 받은 스트레스를 밤에 풀 수 있었다.
깽도, ㅇㅈ도, ㅅㅇ도 없는 학교에서 나에겐 진정한 '친구'라는 존재가 필요했었는데,
크리스티나가 그 공백을 채워줬다.
낮에는 그녀 역시 연극 연습때문에 바빴고, 나 역시 공부한답시고 연구실에 앉아있었는데,
밤에 그녀와 낙성대로 내려가 양집에서 진토닉을 먹을 때면,
독문학과,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세상이 그나마 좀 살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날 살 수 있게 만든 또 하나는 지도교수님과의 캠퍼스 투어.
그걸 '산책'이라 부르긴 했지만, 장장 2시간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하루가 다 가곤 했다.
그래도 선생님과 진심으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논문의 가닥을 잡는데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너무 정신이 없고 마음도 피폐한 상태에서 내가 '논문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하는데에도 선생님과의 산책은 (지금 돌이켜보면)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솔밭식당에서 국수를 먹으며 이른 저녁을 떼우고 저물어가는 태양을 배경삼아 걷다가 커피 한 잔씩 홀짝이며 연구실로 향할때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머리 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는 걸 다 쏟아냈지만서도 기분은 상쾌했다.
또한 그 사람으로부터 마음 속으로 거리를 둘 수 있어서 좋았다.
10월 초에는 설악심포지움. 경주로 갔다.
아아아, 정말 행복했다.
오전, 오후로 독일어 발표를 듣느라 진이 빠지고는 했지만, 밤에 사람들과 맥주를 기울이며 보냈던 시간들이 참 소중했다.
가기 전날에는 너무나 가기 싫어서 깽을 불러 여기서 하소연을 했건만,
막상 가고나니 가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석사를 끝내고 무엇을 공부해야할지에 대한 가닥이 잡혔기에 신나게 놀고만 왔다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경주는 아름다웠다. 내 마음도 너무 즐거웠다.
안압지의 야경과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지쳤던 내 마음을 토닥거려줬다.
그래, 그 때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심포지움 직후 집중세미나. 독일에서 오신 교수님들과 이루어졌던 독어세미나.
재밌는 건, 세미나 전날 독일 선생님들을 모시고 우리측에서 교수님 몇분이랑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는 나의 지도교수님도 계셨다. 1차 한정식을 먹고 2차 맥주를 먹고 다들 다음날 세미나를 위해 일찍 자리를 뜨는데,
나와 크리스티나(그녀는 연극 도우미와 독일측 조교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만 남게 되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술에 취하시면 맥주를 무한섭취하신다...
그래서 "우리 한잔만 더하자"라는 말이 몇백번 나오기 일쑤다.
이날 역시 그러셨는데, 심지어 맥주집이 마감할 때까지 술을 먹었다.
난 그래도 적당히 조절하며 마신다고 했는데도 취했다.
3차는 문 연 곳을 찾다보니 인근 정육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정말..
...갑자기 선생님께서 날 쳐다보시더니
"너도 흡연자잖아?! 왜 담배 안펴?"라고 귀엽게 도발하셨고,
그렇잖아도 알코올을 섭취하면 담배가 땡기는 흡연자로서 난 한대를 당당히 피웠다.
그러자, 몇년째 금연을 하시던 선생님께서도 담배를 피시기 시작하셨다.
아, 손의 연장선이 된듯한 담배를 피는 선생님은 정말 섹시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40대 아줌마로 봐야하는데, 정말이지, 담배를 피는 선생님은 정말 멋졌다.
다시 한 번, 이런 분은 스승으로 모신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광란의 알코올밤을 보내고 다음날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세미나에 들어온 우리 셋(나, 크리스티나, 선생님)은 숙취에 시달리며 정신 없는 상태로 앉아만 있었다.
이 집중 세미나에 대한 또다른 기억은 바로 kik.
kik만 아니었으면 더 즐겁고 활발한 토론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분때문에 기분 잡친 적도 적잖았다.
특히 독일 교수분께서 표정이 썩을때의 민망함이란...
나중에 크리스티나한테 듣고보니 그 분들께서 kik를 정말 싫어했다는....ㅡㅡ;;
세미나가 끝나면서 크리스티나와도 작별을 해야했다.
우리는 항상 술을 먹고나서 문을 연 곳이 없어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먹으며 몇시간을 앉아있었는데,
그녀가 떠나기 전날에도 우리는 만났다.
그 전에 그녀는 한국와서 알게된 친구들과 인천에서 만나고 나를 늦은 밤에 만났다.
그 때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아 술을 먹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편의점에 앉아서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가져가지 못하는 짐을 정리해서 나에게 안겨주었다.
헤어져야했는데, 우리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몇년 사귄 연인을 유학보내는 사람들처럼 애뜻한 마음으로 우리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작별했다.
많이 허전했다. 삼개월동안 큰 위로가 되어준 친구였고, 같이 지냈던 짧은 시간에 비해 진심이 통했던 친구였기에.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간 10월 중순 이후로 나의 논문 러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잊혀지지도 않는 10월 28일, 논문 개요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써놓은 것이 없었던 나는 발표문 10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정신적으로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원래는 삼일전에 심사위원선생님들께 발표문을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난 이틀전에 겨우 보내드렸다.
그러고나서 지도교수님과 발표문을 검토했는데, 너무 지적된 사항들이 많아서 다시 다 수정하고 전날 밤에 다른 선생님들께 다시 보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ㅡoㅡ;;;;;;;
발표 당일, 난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발표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왼손은 어찌할지 몰라 의자 손잡이를 꽉 부여잡고 있었고, 중간쯤부터는 너무 부끄러워서 눈을 감고 반을 외워서 발표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괜찮았다. 나올만한 지적들이 나왔고,
무엇보다 지도교수님의 디펜스가 감동이었다.
발표 후에 사람들이 죄다 "선생님에 널 사랑하시나봐"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나 역시 절을 백번 드리고 싶을 정도로 쉴드를 쳐주셨다.
발표문을 읽고 난 뒤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나 대신 모든 대답을 해주셨으니,
선생님의 노고에 대해서는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발표가 끝난 날, 선생님게서 수고했으니 조금 더 고생하자라는 메일을 보내신 걸 확인했을 때, 난 진짜 눈물이 날 뻔했다. 선생님께서 내가 쏟으신 애정이 이 정도이니 사람들이 그런 인상을 받았더라도 할말은 없다.
그러나 나만 알 것이다.
그런 시간이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한번은 간단하게 목차 아닌 목차를 적어 갔는데,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이런 '거지같은' 걸 들고왔냐는 둥, 넌 어떻게 교수가 이렇게 챙겨주는게 그렇게 당연한 대접을 받는다는듯이 가만히 있을 수 있냐는 둥, 온갖 폭언 아닌 폭언을 듣고 나와 반나절을 공황상태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는 "난 공부하면 안되나봐"라던가, "나 논문 못 쓸 재목인가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ㅈㅌ오빠가 많이 다독거려줘서 약간이나마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선생님께서 쏟아부으신 말들이 내 마음 속에서 깊은 뿌리를 내려 논문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쳤을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그래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발표문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하긴,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선생님께 보여드렸던 것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그걸 보신 선생님께선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상상은 간다. (그래도 당시 내 마음 속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 같다.)
발표를 끝내고 나서는 학교를 뛰쳐나가 머리를 했다.
상쾌하게.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서 선생님과 발표 때 나왔던 지적사항들을 정리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전개할 방향을 제시해주셨고, 난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시 학교를 뛰쳐나갈 생각만 했다.
그리고는 ㅎㅎ와 ㅇㅇ이를 꼬셔 족발을 먹으러 갔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다같이 뭘 먹으며 마음 속에 쌓였던 응어리들을 풀고 싶었으나,
그 둘 밖에 없었다.........
ㅇㅇ이와는 그렇게 '친'하진 않았는데,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가까워 진 것 같다. 후후.
이전에는 트위터를 통해서만 대화를 했고, ㅎㅎ가 없으면 살짝 어색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둘이 있어도 재밌게 수다를 떠는 정도가 되었으니.
사실 ㅇㅇ이나 ㅎㅎ가 없었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버팀목이 되어줬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는 수헙생 소녀들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혹은 각자 공부를 하다가 틈틈이 우리는 수다를 떨었고, 논문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다스렸다.
그들은 어쨌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난 그랬다.
난 아마 그 둘이 없었으면 외로움에 무슨 짓을 벌였을지 모르겠다.
우리끼리 나가서 저녁을 먹기도 했고, 서로 누가 언제 연구실에 나왔는지 체크를 해가며 각자 논문을 준비했다.
논문은 '준비'했다고 하는 이유는...내가 11월달 내내 아무 것도 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발표 다음날에도 나를 학회에 나오라고 부르실 정도로,
학회 뒷풀이에까지 날 데려가실 정도로 애정은 많으시나 "내가 논문 쓰는 거...신경 안쓰시나?"싶을 정도로 논문 진행상황에 무관심하신 듯 보였고, 난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참, 발표 다음날 학회 뒷풀이도 참 재밌었다.
저녁을 먹고 2차로 맥주를 드시러가는 교수님들 사이에서 난 살짝 빠져나갈까 고민을 하며 밍기적거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날 포착하시고서는 같이 들어가자 하셨다.
그랬더니 다른 선생님께서 "선생님, 이 학생만 너무 이뻐하시는 거 아녜요?"라고 장난스레 물었고
선생님께서는 "그렇지? 너무 티나지? 난 좋은데, 얜 괴로워."라며 "우린 이미 공인된 사이니까, 어서 들어와"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2차까지 들어가게 된 나는 선생님 옆에 붙어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건, 다른 선생님들이 우리 선생님의 과거를 폭로할 때였다.
나야 뭐, 10월달에 있던 집중세미나 뒷풀이에서 선생님과 노래방에서 둘이 노래도 부른 적이 있고, 선생님의 주량을 알고 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선생님들끼리만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듣는 건 참 신기했다.
(자세한 에피소드는 개인 사생활 보호상 언급할 수는 없음. 단, 선생님의 과거와 나의 현재가 그리 크게 다르진 않다....)
생각해보면, 지금 나랑 같이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몇년 후면 다 '선생님'들이 될텐데,
우리들도 사석에서 그렇게 놀겠지-싶다.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십년 후에 ㅈㅌ오빠한테 "서선생님", ㅅㅎ한테 "조선생님"하면서 지낼 생각을 하면, 뭔가 짜릿하면서 즐겁다.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인연이 쭉 이어진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거,
정말 좋은 거다. 축복인거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보면...
11월 말에 대학원 엠티를 갔다.
강화도로 갔는데, 경주에 이어 정말 즐거웠다.
예산도 높게 책정되어 초호화 엠티를 갔다왔다.
버스를 대절해서 편하게 이동하고,
낮에는 회, 저녁에는 한우로 포식했다.
석모도에 가서 보문사도 구경하고,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마셨다.
그때만큼은 수학여행 간 고딩때의 마인드로 돌아갔던 것 같다.
그냥 아무런 고민없이 하하호호 웃으며 사진 찍고, 장난치고..
그러나 문제는 밤에 술을 먹을 때 벌어졌다.
처음에는 맥주 페트병 5개만 사갔는데, 내가 밤에 합류하신 지도교수님에게 그걸 일러바치는 바람에 추가로 술을 더 사온 것이다. 난 왠지 모를 의무감에 술을 마구 들이키기 시작했고, 결국 내가 만취해버리는 시츄에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난 정말이지 일년에 한두번 만취한다.
웬만하면 깽이 있을 때나 그러는데, 하필이면 대학원 사람들과 지도교수님이 옆에 있을 때 그래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지금 돌이켜봐도 오글거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백만번할 일이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으로 난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와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를 불렀다.
직접 목격한 후배 말로는 소리는 무지 컸으나, 가사 전달율은 30%였다고 하고,
그 전에 자러 들어간 선배 말에 따르면 양희은 노래만 몇백번을 불렀을 것이라고.....ㅡㅡ;;;
그런 광란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난 당연히 일어나지 못했다.
거실에 뻗어 자고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해 침대가 있는 방에 가서 누웠다.
누워서 자고 있는데 임조교님께서 날 깨우시고, 누군가가(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날 배개로 때리기 시작했다.
결국 난 일어났고, 짐을 주섬주섬 챙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는 속이 불편하여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창문을 열고 손에는 검은 봉투를 꼭 잡고서는 잠에 들었다.
사당에 내려서는....속을 게워내고 기숙사에 들어와 뻗어버렸다....
몇시간을 자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해장은 해야겠는데 도저히 혼자 뭘 먹을 기분이 안나서 깽을 불러내어 일본식 라멘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 한 분께서 대학원생들 밥을 사주시겠다고 하셨기에 당연히(;;;;) 갔다.
원래 스케쥴은 거기서 저녁을 먹고 나와서 예전에 약속했던대로 ㅅㅎ와 함께 양집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내가 하도 양집에서 술을 먹다보니 주위 사람들이 궁금했을 터, ㅅㅎ가 한 번 가보고 싶다기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저녁자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맥주를 시키기 시작했는데...내가 풀가동되었다면 빨리 비워졌을테지만, 전날의 과음과 양집에 가기로 기약했던 바가 있었기에 난 굉장히 조절을 하며 술을 마셨고, 맥주병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워졌다.
그리고 다 비울즈음에는 선생님께서 다시 맥주를 들고 오셨고,
'간단한' 저녁식사는 10시 반에 끝나게 되었다.
그래도 양집에는 가야한다는 일념하에 ㅅㅎ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한산했던 그날, 우리는 각자 진토닉을 마시며 그동안 못나눈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문학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연구실이 달라서인지 제대로 대화 한 번 못나눴던 것이었다.
솔직히, 이전까지 나는 한달동안 아무 것도 쓴 것이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ㅇㅇ이와 ㅎㅎ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나의 논문진행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ㅅㅎ와 얘기하면서, 그녀 역시 개요발표 이후 슬럼프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다소 마음이 가벼워진 나 역시 솔직하게 내 상황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냥 얘기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렸다.
그리고 힘을 얻었다.
할 수 있다고.
제2차 요지발표가 얼마 안 남았지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음날부터 그냥 마구잡이로 쓰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것들을, 정리해놨던 것들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계속해서 '아무 것도 안해놨다'는 생각때문에, 늦어지는 진도때문에 불안해졌고 불안해질수록 글은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는 이주만에 쓰던 것마저 엎어버리고 새로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소리내어 읽으면 한시간에 20페이지 정도, 묵독하면 50페이지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양이 나오면 되기에 그냥 발표용 스크립트를 쓰면 될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다. 즉, XX 한 것이다"를 "그에 따르면 ~한 것입니다. 즉, XX하다는 거죠"로 풀어쓰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을 해놓으니, 글이 훨씬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몇장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도교수님께서도 호출하지 않으셨고 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선생님께 찾아가지도 않았다.
발표는 12월 22일 목요일, 내가 다시 쓰기 시작한 건 13일 화요일.
선생님들께는 19일 월요일날 드리기로 하면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 생각만으로 버티고 글을 썼다.
그러나 금요일이 되자 내 머리는 마비가 되어버렸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목표분량의 50%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막혀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일찍 들어와서 쉬려했다.
주말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것이었다.
그 때! 저녁 7시에!! 지도교수님이 전화를 하셨다.
왜 안 찾아오냐고.
너 그렇게 자신있냐고.
왜 자기가 찾을 때까지 이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냐고.
얼마나 썼냐고.
언제 보내줄 것이냐고.
다급해진 나는 내일,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까지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는 토요일 아침....이 아닌 대낮에 일어나 연구실로 갔다.
가서 열심히, 미친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점심, 저녁 먹은 시간이랑 중간에 30분 가량 낮잠을 잔 시간을 포함해서 총 10시간만에 난 탈고를 했고,
밤 9시에 선생님게 메일을 보냈다.
뭐, 분량으로 따지자면 목표에서 열페이지정도 모자랐고, 결론도 쓰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본론은 끝낸 것이다.
그 때의 쾌감이란!
메일을 보내고나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난 잠시 안정을 취하고자 난장판이었던 연구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불안한 것도, 평화로운 것도 아닌 기분.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버린 기분. 해방감 비스무리한 쾌감.
어찌저찌해서 2차 요지발표까지 끝냈다.
그리고 오늘처럼 한산한 카페에 앉아 올 한 해를 정리할 시간까지 얻었다.
오늘 나는 주말에 구운 컵케이크를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나눠줬고,
아빠 목도리와 내 목도리를 뜨고 있으며, 간간히 일을 하고 있다.
마음에 여유를 찾아서인지 저녁도 학교 밖에 나와 먹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넷북으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쓰고 있다.
폭풍같은 일년이었다.
웃기도 많이 웃었고, 술도 많이 먹었고, 실수도 꽤 했다.
누군가에게 설레어보기도 했고, 그 누구 때문에 눈물도 꽤 흘렸다.
지금 마음은 평화롭다.
칼바람이 쌩쌩 불어도 마음은 따뜻하다.
올해의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논문'이겠지만, 간간히 잘 놀기도 한 것 같다.
마음도 지멋대로 움직인 걸 보면, 피폐하게만 보낸 시간은 아닌 듯 싶다.
나의 2011년은 꽤 쓸만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