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시나가 후미, "사랑해야하는 딸들"
- aBouT X
- 2012/01/08 01:49
- 만화, 요시나가 후미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서양골동양과자점"이라는 만화를 건네주며 "진짜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가 잔뜩 나와"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히기를, "동성애물 싫어하면 거부반응보일 수도 있는데 이건 그렇게 심하지 않으니까 한번 봐봐"라 했다.
요시나가 후미라는 작가와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림체가 마음에 들었고, 작품도 탄탄하다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 작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대학 들어와서 한참이 지난 후에 이 작가가 BL 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원래 좋아하는 작가나 감독의 작품은 모조리 다 보는 걸 선호하지만
개인적으로 팬픽이나 야오이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약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몇년에 걸쳐 나는 결국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게 되었다.
동성애, 특히 남성 간의 사랑을 많이 다루었지만, 내가 싫어하는 류의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류는 그러니까 뭐..동성애라는 허울 아래 결국 3류 이성애 로맨스를 답습하는 그런 거...)
그래서 다시 한번 작가에 감탄하게 되었다.
요시나가 후미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부분은 섬세한 심리묘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소소한 일상을 꿰뚫어 보고 그에 내재된 의미를 발견하여 적절히 그려낸다는 점이다.
특이한 상황을 특이하지 않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주면서
누구나 겪을 법한 일상적인 일들을 유의미한 것으로 격상시킨다.
(그점에서 보면 카프카와 닮은 것 같기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외부로 확장되지 않는다.
새로운 인물들이 마구잡이로 등장하여 스토리가 산으로 가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매우 탄탄하다.
자, 그럼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라는 작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볼까?
내가 이 책을 집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이다.
작년에 홍대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은 이 놈아가 지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한양문고에 들어갔다.
만화책들을 하나씩 찬찬히 훑어보는데 순간 FUMI YOSHINAGA라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단행본임을 확인하고 바고 결제.
그리고는 8번 출구 앞에 있는 농협 근처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친구가 오고 나서도 난 책을 가방 속에 넣기 힘들었다. 빨리 다 읽고 싶었기 때문에...
일년이 지난 지금도 간간히 다시 손에 쥐게 되는 만화다. 할일 없는 날...숙취에 시달리는 날...
책 뒤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본다면,
"딸과 어머니, 딸과 할머니, 어머니와 할머니
남녀의 사랑, 육친의 사랑, 친구의 사랑
서로를 향한 사랑, 한쪽을 향한 사랑, 모두를 향한 사랑
여자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잔잔하지만 깊게,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이 만화는 다섯가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이 다섯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유키코.
첫번째 에피소드는 유키코와 엄마 마리의 이야기이다.
유키코의 아버지는 유키코가 12살 때 돌아가시고 그 이후로는 모녀 단 둘이 산다.
뭐, 그런 경우에 언제나 그렇듯히 모녀가 아웅다웅 다투는 장면으로 만화는 시작한다.
한데, 여기서부터 인상적인 대사 나온다:
(고등학생인) 유키코: 왜 그래요?! 대체 엄마는 만날 왜 그러는 건데?! 이런 건 괜한 화풀이 아냐!!
마리: 뭐? 그래, 화풀이다. 그게 뭐가 잘못인데? 부모도 사람이야. 기분 나쁠 때도 있다고! 네 주위가 모두 너한테 공정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그런데 마리가 50살이 넘어 암에 걸린다. 물론 성공적으로 수술을 해서 살아남지만 그 후 그녀는 딸인 유키코보다 세살이나 어린 배우(지망생)과 재혼을 해버린다. "해 버렸어. 뭐 어떠니. 내 인생인데."라는 말로 딸에게 자신의 재혼 사실을 통보하는 마리.
오오하시(마리가 재혼한 남자)는 둘이 사는 집에 들어오고 셋이 같이 살게 되지만 유키코는 처음부터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마리를 정말로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겠다고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어머니가 딸에게 냉정하게 자신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내가 네 엄마라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쁠 때도 있고 네 칭얼거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너한테 화풀이하고 싶을 때가 있어. 네가 내 딸이라는 거랑, 내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느끼는 감정이랑은 서로 무관해. 내 기분이야. 내 감정이야. 내 인생이야. 너에 대한 의무감에 그런 걸 숨기거나 왜곡하고 싶지 않아'라는 식의 마리는 너무 멋지다.
잔인하도록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부모를 '부모'가 아닌 '인간'으로 대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하지 않을까?
난,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만큼이나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다양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부모 역시 자식에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내 자식이니깐 '당연히' 희생을 감수해야한다는 논리는 이제 좀 집어치울 때가 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대한민국의 위대한 어머니'像을 혐오한다.) 이 만화에 나온 마리처럼 자식에게 매정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인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 에피소드가 마음에 든다.
다음 에피소드는 마리의 남편 오오하시의 고등학교 동창 이즈미 키요타카의 경험담이다.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키요타카에게 어느날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 찾아온다.
자신은 괜찮다며 키요타카를 성적으로 '유혹'하는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되려 그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가겠다는 협박에 키요타카는 넘어간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결코 '끝'까지 가진 않는다.
그 여학생은 알고보니 엄청난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여자였다.
자신은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상대방에서 성적으로 '봉사'를 하면서도 그 쪽이 받아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타입.
키요타카는 그래서 "...너 대체 어떤 끔찍한 애들하고 사귀었던 거냐?"라고 묻자 그녀는 "왜..왜요? 다들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저 같은 여자 아파트에도 놀러와 주고 제가 해 주는 밥도 먹어 주고 제가 사 온 선물도 받아 주고..."라 답한다.
난 이 별거 아닌 것같은 대화에 꽂혔다.
왜?
내...가...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온갖 것을 다 퍼다주면서 상대방이 받기만 해도 황송하고 고맙다.
그 모습이 이 여학생과 오버랩되면서 마음을 울렸다.
한편으로는 '아-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안도감도 느껴졌다. 누군가가 토닥토닥거리는 기분. 위안.
다음으로 인상이 깊었던 대목은 마지막에서 두번째 에피소드인데,
여기서는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딸로 등장했던 유키코의 중학교 동창들이 등장한다.
중학생때는 여성의 인권이나 미래의 꿈에 대해 조잘거렸지만,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각자의 길을 간 세명의 친구들은 살면서 지치고 중학생 때 품었던 원대한 꿈들을 하나씩 잃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날 유키코가 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
"중학교 때 얘기했던 것처럼 집안 내의 남녀평등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일은 그만두지 않고 힘내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친구 중 한명은 "그대로 어떻게든 일은 그만두지 않고 힘내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그 시절 얘기했던 자그마한 꿈을 지켜내 주고 있는 친구가 이렇게 있었던 거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살아야할 것 같다.
살면서 어렸을 적 꿈꿨던 삶이나 미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을 영위하지만, 그래도 '힘'을 내며 묵묵히 걸어가야하는 것이다. 그게 꿈을 지키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지쳐가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질 때에도 나의 꿈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우리의 꿈을 지키고 있다는 믿음 또한 잃어버리는 안되는 것이다. 그 힘으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은 다시 한 번 모녀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이다.
마리는 어머니로부터 칭찬 한 번 받은 적이 없어 엄청난 외모컴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리고 심지어 "친부모라도 난 저 할망구가 죽는다 해도 절대로 안 울걸."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마리를 너무나도 예뻐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가 건방져질까봐 역으로 그녀를 깎아내렸던 것이다.
"난 이 아이를 더 귀여워했다간 이 아이의 미래가 끝장이 날 거라고 생각했단다. 마리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런 재수 없는 아이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그래서 난 그 뒤로 마리에 대해선 절대로 얼굴을 칭찬하지 않기로 한 거야."
사실 웬만하면 이 쯤해서 마리와 마리의 어머니는 화해를 하고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마리가 대성통곡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요시나가 후미는 그렇게 진부하지 않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 알게된 유키코(마리의 딸)은 이 사실을 오오하시에게 알려준다.
근데 그의 반응이 대박이다.
"그건 마리 씨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완성되어 버린 그녀의 콤플렉스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알고 있는 거랑 용서하는 거랑 사랑하는 건 다른 거니까. 그리고 부모를 좋아하지 못했던 건 불행한 일이지만 결국 대단한 건 아니잖아."라 일침을 가한다.
맞는 것 같다.
인생은 화해로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 화해에 대한 강박이나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다 알고 있어도 용서가 안되는 것이 있고, 부모라 해도, 자식이라 해도 '일반적인 정도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불행하리란 법도 없다.
삶이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뿐.
이런 묘사들이 좋다.
거대한 감정의 폭발 없이 소소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기법.
꼭 추천하고 싶다.
단행본이라서 짧은 시간 안에 다 읽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사랑해야한 딸들"이 "어머니라는 존재도 결국은 한 명의 불완전한 여자인 것"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기에.
- 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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